<국보>를 봤다. 일본에선 문화현상이 될 정도로 공전의 성공을 기록했지만, 국내 개봉은 조용하게 진행 중이다. 옆 나라 열풍과 달리 국내 관심이 시큰둥한 데엔 이유가 있다. '왜색' 끝판왕 '가부키'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3시간 육박하는 대작이다. 1차 관문 용케 넘어도 2차 장벽에 가로막히기 딱 좋다. 그런 좁은 문을 통과해 도착한 실물은 어땠을까?

196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2차 대전 패망 이후 부흥한 일본에선 문화예술 붐이 한창이고 덩달아 야쿠자도 활황이다. 지역의 유력한 조직 타치바나구미 신년회가 고급 요정에서 성대하게 열리던 참, 공연차 방문한 오사카 유명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는 그곳을 방문해 환대를 받는다.

여흥을 위한 약식 가부키 공연에서 그는 뛰어난 재능의 소년 배우를 발견하고 누군지 묻자 뜻밖의 답을 얻는다. 보스의 아들 '키쿠오'란 것. 흥미가 생긴 한지로는 소년과 만나길 청하고, 키쿠오는 유명 배우와 대화할 행운에 부푼다. 하지만 경쟁 조직의 습격이 벌어지고, 키쿠오의 부친은 체면이 손상되는 탈출을 포기하고 장렬히 맞서다 아들 앞에서 최후를 맞는다. 그 순간 키쿠온의 눈앞에 어떤 '풍경'이 잡힌다.

1년 후, 키쿠오는 오사카의 한지로를 찾는다. 그때의 인연으로 한지로가 그를 돌보기로 한 것.
후견인이 된 한지로는 부친의 복수는 그만두고, 소질이 있던 가부키 배우로 입문을 권한다. 의지할 곳 없던 키쿠오는 이를 수락하고, 동갑인 한지로의 아들이자 가부키 명문의 후계자 '슌스케'와 혹독한 훈련에 돌입한다. 고단한 시간이지만 동경하던 가부키의 길에 매진하며 인정받기 시작한 키쿠오는 슌스케와 선의의 경쟁자이자, 둘도 없는 동료가 된다.

피비린내 나는 야쿠자 혈연과 단절하고 새 출발 겸, 그토록 원했던 예술인의 길에 매진하던 키쿠오지만, 새로운 고민이 생긴다. 가부키 가문의 계승자는 실력순이 아니라 철저히 혈연에 따른다. 최고가 된다는 건 태어날 때 결정된다. 하지만 실력을 감출 수도 없는 노릇. 자연스레 둘은 저울에 오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제 그들은 수십 년 동안 개인의 성취와 주변의 응원 속에 기구하고 처절한 승부를 펼쳐야 한다.

<국보>를 제대로 즐기려면, 가부키로 상징되는 일본 문화 자체를 소화해야 한다. 영화 한 편 똑바로 보기 위해 뭐 그렇게 까다롭냐고 불평할 수 있지만, 정말로 제대로 알고 보는 것과 아닌 건 차원이 다른 체험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영화라는 대중예술이 총체성을 띠는 장르라는 증명이기도 하다. 아마 이 영화 세부 고증만으로도 설정집 책 한 권 너끈히 나오지 않을까?

일본의 많은 감독이 그렇지만, 이상일 감독의 현장은 무척이나 혹독하고 엄격한 걸로 소문이 자자하다. 모 유명 여배우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분위기의 현장으로 유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이상일의 작품을 연달아 작업한 후 자신의 연기 인생에 큰 영향을 줬지만, 무척 상반된 현장이라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런 깨알 같은 '디테일'을 흡수하며 <국보>를 본다면, 예술과 인생의 상관성, 끔찍할 정도의 마성이 우리들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해 주인공이 평생 쫓던 '풍경'처럼 어느 틈에 빨려들고 말 테다. <국보>는 그 모든 걸 잔혹한 매혹으로 구현한 영화다.